영양 천씨 가문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병으로 왔다가 귀화한 천만리와 그 후손들의 역사로 잘 알려져 있다. 천만리의 전공은 ‘충’의 이야기로, 부산 석대 지역 후손들이 5대에 걸쳐 이어간 효행은 ‘효’의 이야기로 남아 있다. 여기서 영양은 경상북도 영양이 아니라 중국 하남성의 영양을 가리킨다. 가문의 시작과 충·효의 의미를 알아보자.

영양 천씨 가문은 어디에서 시작됐나?
영양 천씨의 본관인 영양은 중국 하남성에 있던 지명이다. 한국에서 흔히 알고 있는 경상북도 영양군과는 한자와 유래가 다르다.
가문의 시조로는 천암이 전해지고, 한국에서 영양 천씨의 계통을 크게 이어간 중시조로는 천만리가 꼽힌다. 천만리는 명나라 무신으로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견됐다가 전쟁이 끝난 뒤 조선에 정착한 인물이다.
| 구분 | 내용 |
| 본관 | 영양, 중국 하남성의 지명 |
| 시조 | 천암 |
| 중시조 | 천만리 |
| 한국 정착 계기 |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참전 후 조선에 정착 |
천만리는 본관이 중국 영양이며 자는 원지, 호는 사암이다. 조선에서는 화산군으로 봉해졌고 시호는 충장이다. 이 때문에 영양 천씨의 한국 역사를 설명할 때 천만리를 중심 인물로 다루는 경우가 많다.

왜 충의 상징으로 천만리를 말할까?
천만리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전공을 세운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조병영량사로 아들 천상과 함께 조선에 들어와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평양 전투를 비롯해 곽산과 동래 등에서 전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에는 울산 전투에도 참여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명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머물렀다.
당시 조선에서는 그의 전공을 인정해 화산군으로 봉하고 토지를 지급했다. 아들 천상도 관직에 올랐다. 천만리에게 내려진 ‘충장’이라는 시호 역시 그의 무장으로서의 삶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원군으로 조선에 들어왔다.
- 평양을 비롯한 여러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 정유재란 때에도 전투에 참여했다.
- 전쟁 이후 조선에 정착했다.
- 화산군에 봉해지고 충장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따라서 영양 천씨를 ‘충의 가문’이라고 설명하는 배경에는 단순한 가문 전승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천만리의 임진왜란 참전 기록이 자리하고 있다.

영양 천씨가 효의 상징으로도 불리는 이유는?
부산 석대 지역의 영양 천씨 문중에서 5대에 걸쳐 효자 5명과 효부 1명이 이어졌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효행을 기리는 영양 천씨 정려각도 남아 있다.
석대 문중에서는 천성태를 시작으로 천세모, 천술운, 천상련, 천우형까지 다섯 세대에서 효행이 이어진 것으로 전한다. 여기에 천우형의 아내 김해 김씨도 효부로 함께 기려진다.
| 세대 | 효행 인물 |
| 1대 | 천성태 |
| 2대 | 천세모 |
| 3대 | 천술운 |
| 4대 | 천상련 |
| 5대 | 천우형 |
| 효부 | 천우형의 처 김해 김씨 |
이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석대 문중에서는 1960년 정려각을 세웠고, 이후 현재의 자리로 옮겨 다시 세워졌다. 그래서 영양 천씨의 ‘효’는 가문 전체를 막연하게 미화한 표현이라기보다 특정 문중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전해진 효행 기록과 연결해 이해하는 편이 정확하다.

마치면서
충과 효의 상징 영양 천씨 가문을 이해할 때는 두 가지 역사를 나눠 보면 쉽다. 충의 이야기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전한 중시조 천만리에게서, 효의 이야기는 부산 석대 문중에서 5대에 걸쳐 이어진 다섯 효자와 한 효부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문집과 족보, 정려각은 이런 가문의 역사를 보여주는 자료다.
[안내드립니다] 이 글은 영양 천씨 가문의 역사와 관련 기록을 바탕으로 정리한 일반 정보입니다. 시조와 초기 계보에 관한 일부 내용은 족보와 후대 기록에 근거한 전승이 포함되어 있어 자료에 따라 세부 설명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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